서울병

2020.05.24-2020.06.08

1

서울, 7평

  밤새 그리운 꿈을 보았다. 그립고도 두려운 풍경. 내 자아의 한계선을 그어놓은 것만 같았던 7평짜리 직육면체의 공간. 그래도 그 도시에서 7평이면 넓은 편이었다. 낯선 열대야에 눈이 감기지 않을 때면 옥상의 공기를 한 번 두 번 심호흡하곤 했다. n평의 자아들이 모인 그 마을의 공기는 회색과 검은색만 늘어놓은 팔레트처럼 색감 없이 독특했다. 좌절과 체념과 무채색의 희망,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치기와 혈기가 섞여있는 마을. 신림동 고시촌. 2년 남짓한 내 서울 생활의 둥지였다. 조밀하게 붙어 앉은 좁은 직육면체의 자아들이 면과 면을 부대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타인의 한숨조차 뺏어마셔야 숨쉴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갈증이 있었다. 지식에 대한 갈증. 생존을 위한 지식이 아닌 삶을 위한 지식을 배우고 싶었다.  2017년 1월, 나는 연고도 없는 그곳 서울로 향했다. 무미건조한 기술들을 익히는 게 생존하는 법이라고 가르쳤던 4년 간의 대학 생활을 뒤로 하고, 인간을 공부하고자 상경길에 올랐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새로웠다. 그들의 말이, 표정이, 걸치고 있는 옷이, 눈빛이 새로웠다. 여태 지낸 곳들도 도시였지만, 서울은 그 이름만큼이나 독보적이고 압도적인 도시였다.

  그곳에선 모든 지식이 새로웠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이렇게 설레고 벅차는 일이었던가. 지난 4년 간, 공학 강의실은 내게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쳤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문제들이 주어졌고, 종이 위에 그려진 낯선 나라의 문자들은 정답을 향한 이정표라고 배웠다. 그러니 정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다. 주어진 문제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에게는 항상 내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문패를 달아놓은 강의실은 ‘문제’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법을 배웠다. 보이지 않는 것에 형체를 부여해 문제로 만들었고, 침묵하는 것에 언어를 건네주어 목소리를 일으켰다. 여기선 문제도 정답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삶을 문제삼았고, 어떤 이들은 사람을 문제삼았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나’를 문제삼았다. 나는 그게 너무나 반가웠고,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 믿었다. 서울이 내가 있을 곳이라 믿었다. 실수로 다른 둥지에서 태어나 살아온 뻐꾸기라도 된 양.

  머지않아 나는 나를 말하는 법을 익혔다. ‘나’는 여전히 오랜 문제였지만, 이제는 내 언어로 도식화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은 지면에 내려놓을 수 있다. 나는 비로소 나를 지면에 내려놓는 법을 알았다. 나를 써내려놓을 수록 일기장은 무거워졌다. 나는 선구자들의 무덤 앞에 걸터앉아 그들과 대화하며 ‘나’를 해결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유로워보이는 지식과 사유의 전당에도 규율과 예전은 필요했다. 문제와 정답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문제처럼 보이는 법과 정답처럼 보이는 법은 주어진다. 학문이라는 생태계 앞에 ‘나’의 문제는 초라했다. 새로운 둥지라 믿었던 곳은 상아로 만든 또 다른 구속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학문의 형식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내 자아는 전에 없이 축소되어 있었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내 영혼의 부피는 횡으로 약 23제곱미터, 수직으로 약 2.3미터였다. 삶에 대한 갈증만으로 무모하게 상경한 나에게 서울이 허락한 공간은 딱 거기까지였다. 상아색 벽지로 발라놓은 천장과 벽은 구분되지 않았다. 방위 감각을 잃은 채 매트리스에 널부러져 있자면, 육면체로 조각난 영혼들의 진열장에 전시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끝을 들고 숨을 들이쉬면, 턱 밑까지 차오른 그림자에 질식하지는 않았다.

  밤 도시를 걸었다. 도림천 물길을 따라 걷다가 땅으로 올라와 아스팔트길을 밟았다. 서울 어디에 서있든, 사방으로 난 반듯한 아스팔트길은 어디로든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귀를 틀어막은 이어폰에서는 사람12사람이나 쏜애플 같은 이름들이 연주된다. 서울에서는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정처없이 걸어도 헤맬 수 없다. 어느 길을 걸어도 사람으로 연결되고, 어느 땅을 밟아도 혼자일 수 없다. 지도를 들여다본다. 도시는 결점도 사각도 없이 격자 위에 정확히 포획되어 있었다. 지도에 없는 곳으로 가려고 집을 나선 날이었다.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서울의 풍경은 역설적이었다. 반듯한 길들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 풍경 속 어디에도 내가 도착할 곳은 없었다. 헤매지 않고 걸어도 방황하고 만다. 혼자일 수 없었고, 함께일 수 없었다. 거룩하게 완벽한 지도 위에 나침반은 당황한 듯 고개를 들지 못한다. 걸음을 재촉하자 낯선 길들이 스쳐갔다. 거리들도 사람들도 서로를 모방한 듯 같은 차림새로 서있다. 가식이라는 타일을 끼워맞추어 놓은 거대한 테셀레이션. 점멸하는 싸인들이 망막을 어지러이 괴롭히면 만화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기증을 느낀 찰나, 앨범이 몇 번을 되돌이했는지 마지막 트랙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한다. 서울. 고개를 들어보니 7평짜리 그림자 앞에 다시 서있다. 귀소본능일까. 마지막 트랙이 끝날 때까지만 귀가를 미루었다.

2

서울, 나선

  서울이 재생된다. 스피커가 운다. 불 꺼진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내려다보니 서울의 풍경이 재생되었다. 감색으로 물든 하늘은 별 한 점 없다. 지상에 박혀 있는 필라멘트 별들이 대신 밤을 밝혀주고 있다. 준희는 내 옆에 누워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23층 6호실. 직육면체의 암실은 도시적 자아의 경계를 넘어 지상으로 뻗어 있었다.

우린 함께 울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법만 배우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채로
이 도시에 갇혀버렸네

  기타 리프가 들어오자 보컬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증 어린 이름을 여러 번 부른다. 서울, 서울, 서울. 6분 48초 간의 연주를 마치고 화면이 첫 트랙으로 되돌아간다. 스피커를 껐다. 부드러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내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준희가 가슴에 얼굴을 묻어 왔다. 기분 좋은 침묵과 살갗에 닿는 숨결. 몸을 얽은 흔적이 아직 열기로 남아 있다. 우리 잠깐 걸을까? 준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을 나왔다. 광화문 광장을 가로질러 서촌 방향으로 걷는다. 행선지는 없다. 이동이 아닌 걸음,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 걸음이다. 같은 걸음도 그것이 수단일 때와 목적일 때의 차이가 크다. 발에 와닿는 땅의 감촉이 다르다. 스치는 풍경의 무게가 다르다. 함께 걷는 이와 주고받는 표정이 다르다. 한없이 늘어진 걸음걸이에 시간도 함께 늘어진다. 이동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동하지 않는 우리만이 특별해진다. 광화문을 지나 궁벽을 따라 서촌으로 들어섰다가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청계천 방향으로 향한다.

– 서울이라는 도시, 참 특이하지 않아? 동서고금이 혼재되어 있잖아. 이렇게 혼란스러운 도시인데 어디서 이런 활기가 나오는 걸까? 잠들지 못하는 도시야.

  청계천이 보이기 시작하자 조용히 걷고 있던 준희가 말을 꺼냈다. 준희는 잡고 있던 손에 슬며시 힘을 실어온다. 과연 나도 같은 감상을 곱씹어보던 참이었다.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달빛으로, 부족한 별빛은 필라멘트로 채워가며 빛을 꺼뜨리지 않는 도시다. 빛이 사그라들기에는 이 도시는 아직 뜨겁다. 하지만 밝기만 한 빛은 짙은 그림자를 만드는 법이다. 뜨겁기만 한 열정은 서투른 법이다. 서울의 온도는 아직 서투르고, 서울의 빛은 그림자에 취약하다.

– 맞아. 서울에 혼재된 동서고금의 문화들은 물과 기름 같아.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에 일시적으로 섞여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분리되어 버리고 말지. 유화 상태는 안정적이지 못해. 우리는 옛 성전 앞에 이렇게 우리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흩뿌려 놓았지만, 우리는 옛 문화를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 도시 설계도, 건축 양식도, 이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행정 체계까지도, 모두 서양에서 빌려온 것들이지. 우리는 서양인의 눈으로 스스로의 문화를 타자화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어. 광화문 일대에 들어서있는 간판들만 봐도 그래. 스타벅스니 엔제리너스니 한글로 표기해 놓았지만 죄다 서양의 언어고 서양의 문화야. 서양의 영혼에 조선의 이름표를 달아서 되팔고 있는 꼴이 아닐까?

  나는 조금 달뜬 채로 답했다. 오랜만에 만난 준희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준희의 눈을 보며 말을 하고 있으면 나는 벌거벗은 기분이 든다. 내게 귀기울이는 그녀의 눈이 행간에 숨긴 내 수치심까지 다 훑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의 무지와 충동과 나약함을 이미 그녀가 더듬어 본 건 아닐까. 준희는 그 호기심 많은 눈에 무엇을 담으려는지, 광장 한 가운데에 선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조용히 웃는다.

– 서울은 누구에게나 정체성을 되묻는 곳이야. 너는 어느 시간을 사니? 너는 어느 공간을 사니? 하고 묻는 것만 같아. 조선부터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울에는 시간 축의 각 지점이 방치된 채 현재 속에 뒤섞여있어. 그 결과, 우리는 서로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착각을 보고 있어. 하나의 도시, 분절된 공간들, 그리고 이질적인 시간들. 20세기를 사는 사람과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길 위에서 마주치며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겉치레 인사를 하는 거야. 게다가 너가 말한대로 우리의 영혼은 이국의 문화에 대한 맹신과 열등감으로 점철되어 있어. 한국의 문화와 이국의 문화가 어색하게 이종교배되어 있지. 이건 크로스오버가 아니라 콜라주야. 이 도시는 이질적인 풍경들을 마구잡이로 뜯어서 기워놓은 거대한 콜라주 같아. 그러니까 이 도시는 정체성을 되묻는 곳이 된 거야. 너는 이 콜라주 속에서 어디에 속해 있니?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준희는 느린 호흡으로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투명한 웃음을 짓고 있다. 내가 이 순간이 즐거운 것만큼 준희도 이 순간을 적잖이 기다려 온 거겠지. 청계광장을 지난다. 직육면체 빌딩들 사이로 다슬기 모양의 나선형 조형물이 서있다. 왜 나선일까. 불 주위를 맴돌며 헤매다 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나방의 궤적처럼, 수렴하는 나선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구조를 떠올린다.

– 2년 간의 서울 생활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이었어.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그 질문에 답하는 데에만 꼬박 2년이 걸린 거야. 대답을 찾을 기회를 준 것도 서울이었어. 콜라주된 이 도시를 밟으며 깨달았어. 나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걸. 좋든 싫든 나는 아마도 평생 옮겨다니게 될 거라는 걸 예감했어. 유목민 같은 거지. 그래서 난 이렇게 혼란스러운 서울이 좋아. 소속될 수 없는 곳이기에, 소속되지 않아도 되거든. 이곳 도시의 삶은 자유를 강요받고 자유에 종속되는 삶이야. 자유는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이지. 불안을 즐기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어. 머물고 싶은 곳이 없는 나에게는 머물 곳 없는 이 도시가 잘 어울려.

  말하고 있는 사이에 준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우리는 물가에 앉아 조명빛으로 물든 수면을 관찰한다. 잔잔한 침묵이 낭만적인 공백을 연출한다. 준희는 하고싶은 말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음 하고 말을 시작하려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웃는 표정으로 돌아와있다. 눈은 웃고 있지만 무언가 슬픈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애수를 담은 눈빛이다. 서로의 살을 처음으로 만져봤던 밤 그녀가 지은 표정도 이런 느낌이었다.

– 우린 갇혀버린 거야. 이 도시에. 구룡 반도에 다녀왔을 때, 나는 서울이 숨기고 있던 새로운 표정을 알게 됐어. 내가 접한 홍콩의 광경은 정말 충격적이었어. 현대에 재건한 바벨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마천루의 풍경, 하지만 그 그림자에는 스러져가는 듯 미약한 불빛들이 무수히 타오르며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어. 서양적 문법 안에 동양적 실존, 옛 것과 새 것이 나란히 진열되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빛을 발하고 있는, 그것은 내가 살면서 본 것 중에 가장 뜨거운 광경이었어. 잠들지 않는 욕망들의 용광로. 나는 그런 홍콩의 모습에서 서울을 발견했어. 여태 내가 당연하게 지나쳐왔던 서울의 풍경들이 새롭게 보이는 거야. 그거 알아? 서울의 사진과 홍콩의 사진을 무작위로 나열해놓고 보면 생각보다 구별하기 힘들다는 거. 그렇게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흐름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나는 표류하는 배가 떠올랐어. 서로 부딪으며 깎여나갈 걸 알면서도, 외로울 걸 알면서도, 배를 띄우고 서울이라는 망망대해로 모여든 바보들. 출항한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이 도시에 갇힌 채 표류하고 있는 거야.

  응어리를 쏟아내버린 듯, 준희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애수, 체념, 희망, 기대, 두려움, 그 사이 어디쯤을 보고 있는 걸까. 표류. 나는 무심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졌다. 떠다닐 표, 흐를 류. 두 글자를 하나씩 나눠 새긴 것이 준희와 나의 관계의 시작을 선언하는 표지였다. 준희는 내 손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왼손을 내 왼손 위에 겹쳐온다. 표류가 완성된다. 준희는 활짝 웃어보인다. 그 표정을 보니 갈증이 인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들어갈까? 준희는 말의 속뜻을 헤아리려는 듯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킥킥 하고 웃는다. 그래, 그러자. 호텔 입구가 보이려는 찰나, 준희가 덥석 손을 잡더니 어디론가 끌고 간다. 준희는 반대쪽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담뱃갑을 꺼낸다. 철컥. 지포라이터 경첩의 둔탁한 금속음이 울린다.

– 할 때 하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3

서울, 표류기

  63빌딩이 보이는 한강 어느 다리 아래, 섬이 놓여있다. 섬은 생태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있다. 남자의 성은 김씨,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남자김씨는 모래 바닥에 구조요청 신호를 그려넣는다. HELP. 익숙치 않은 언어로 한강 한 가운데에 던진 신호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다. 이내 HELP는 HELLO로 바뀐다. 두 단어의 의미는 동일하다. 서울시민 남자김씨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은 곧 구조를 요청하는 일이다.

  한강의 어느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한 아파트의 어느 세대, 창가에 카메라가 놓여 있다. 그곳에 여자가 갇혀 있다. 여자의 성은 김씨,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여자김씨는 카메라에 달의 모습을 담는다. 달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 1년에 딱 두 번, 사이렌이 울리면 여자김씨는 카메라를 지상으로 향한다. 서울의 박동이 멈추는 시간은 단 20분. 여자김씨는 타인으로부터 해방된 도시의 풍경을 전유한다. 어느 민방위의 날, 여자김씨는 한강 한 가운데에 던져진 구조요청 신호를 포착한다. HELLO.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신호는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 여자김씨는 남자김씨에게 인사를 건넨다. HELLO. 서울시민 여자김씨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은 곧 구조를 요청하는 일이다.

  2009년 개봉한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 표류기>의 이야기다. 힘든 삶을 비관한 남자김씨는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는 한강 다리 아래에 있는 작은 섬의 물가에서 눈을 떴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시간이 갈 수록 그는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혼자일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는 서울에서 혼자만의 공간과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된 남자김씨는 점차 무인도에 안주하게 된다.

  그 무렵, 강변에 사는 여자김씨는 무인도에 표류하는 남자김씨의 생활상을 지켜보고 있다. 여자김씨는 몇 년 째 방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게 받은 상처가 그녀를 구속한다.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낙인stigma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그녀의 위치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낀 상대는 섬에 혼자 표류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접촉을 시도하여, 간단한 인사말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다. 남자가 그 고립된 공간에서 삶을 일구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희망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주고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품게 된다.

단절

  서울 한 복판에 있는 한강 밤섬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표류기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도시로 자리잡은 서울의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숨 쉴 틈 없이 번화한 도시문명의 한 가운데서 조난을 당한다는 독특한 설정은 ‘고독한 군중’이라는 역설적인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무대 장치이다.

  농업 문명과는 달리 도시 문명은 공동체의 사회적 연결을 느슨하게 만들고 시민들 사이의 익명성을 보장한다. 우리는 1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이웃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 도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고, 한정된 도시 공간 속에서 주어진 노동-역할만을 수행하면 만능의 교환 가치를 지닌 ‘화폐’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화폐를 매개로 할 때에만 비로소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도시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과의 완벽한 단절과 함께 익명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활 양식은 자본주의가 발흥한 중세시대 때부터 운명지어진 필연이었을 테다.

너와 난 잠투정을 부리는 억양이 달라서
농담밖에 할 게 없었네

우리는 결국 한 번도 서로 체온을 나누며
인사를 한 적이 없었네

  도시화가 진행될 수록 사회적 단절은 심화된다. 서울은 고독한 군중을 생산함으로써 성공적인 도시화를 이룩해내고 있다. 서울은 모든 자아를 익명으로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인 채, 서로가 서로의 인사를 듣지 못한 채, 수백만의 외로움들이 서로 부딪으며 미끄러진다. 미디어는 소통되지 못하는 단절된 감정들을 실어 나르고, 군중은 그 단절을 일상으로 간주하며 체념 속을 헤매고 있다. 한강의 밤섬은 이처럼 고립되어버린 군중의 자아를 재현하는 공간적 은유인 것이다. 익명의 주인공 ‘김씨’는 서울을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자아이다.

표류

  영화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이 이야기의 주제는 ‘표류’이다. 주인공 김씨들은 서울이라는 흐름 속에 표류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서울은 서로 마찰하며 팽창하는 도시적 욕망들의 용광로다. 서울은 모든 물적 하부 구조infrastructure의 요충지이자 모든 문화의 진원지다. 그곳에서는 희망도, 소망도, 갈망도 모두 욕망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서울은 그 욕망들 앞에서 한없이 잔혹하다. 자본주의적 도시로서 지속가능하기 위해, 서울이라는 거대한 기계는 빛을 꺼뜨릴 새도 없이 가동한다. 도시의 동력은 쉴 새 없이 일하는 군중의 노동력이다. 도시를 위해 노동-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청객일 뿐이다.

  서울은 우리에게 삶이 아닌 기계적 생존을 명령한다. 서울의 빛은 급류처럼 빠르게 순환하고, 그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낙오자’들은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표류한다. 남자김씨는 이미 서울에 표류된 낙오자였고, 비가시적이었던 그의 표류가 밤섬이라는 무대 위로 이동하면서 가시화된다.

감금

  <김씨 표류기>는 다른 조난 영화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 주인공이 얼마든지 무인도를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김씨에게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찾아온다. 하지만 그는 섬을 나가지 않는다. 그는 명백히 그 섬에 감금되어 있었다. 물리적으로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적으로 감금된 것이다.

  서울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 자신만의 밤섬을 구축한다. 타인으로부터 단절된 자아, 낙오한 채 표류하는 자아는 서울이 허락하는 n평의 공간 속으로 수축한다. n평의 자아들은 직육면체 속에 감금되어 살아간다. 그곳은 탈출할 수 없는 무인도다. 섬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어둠을 모른다. 마천루에 빼곡하게 박힌 필라멘트들은 꺼질 줄 모른다. 하지만 그 많은 빛줄기들 속에 내 몫은 없다. 서울 한 가운데에 자라난 무인도는 창살 없이도 성립하는 감옥이다. 자아를 구속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감금하는 자아는 탈출구를 설계하지 못한다.

희망

  <김씨 표류기>가 바라보는 서울의 도시상은 상당히 냉혹하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장르는 어디까지나 희극이다. 관객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김씨와 여자김씨가 서로를 발견하고, 교류하고, 만나게 될 때까지, 영화를 전개시키는 주제어는 사랑이다. 서울이 겪고 있는 사회적 단절은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하는 집단-유아론적 현상이다. 개인은 타인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적 증후를 보인다. 이러한 증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념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비로소 타인의 자아를 인식한다. 감금된 자아에게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 표류하는 자아에게 나침반을 쥐어줄 수 있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자아의 흔적이다. 단절의 벽을 허물고 우리를 직육면체 바깥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닮은 타인의 존재 뿐이다. 익명이었던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실명이 되는 순간, 표류기가 막을 내리고 삶이 시작된다.  김씨와 김씨의 표류기는 서로를 만나며 막을 내린다.

마음만 먹으면
새까맣게 칠한 밤을 넘어서
너를 만날 수 있는 세계란 걸 알고 있지만
그게 참 어려워

4

  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더위가 꺾이기 시작한 어느 늦여름의 밤.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