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말과 혀와 키스

2020.02.17-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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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동안 길렀던 머리를 삐뚤빼뚤하게 밀고 훈련소 집합장에 섰던 날. 멀리 보이던 가족들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나에게 웃음을 돌려주며 집합장을 빠져나가던 가족들의 뒷모습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웃음 뒤로 숨겼던 감정들도 마찬가지로 가족들에게는 읽혔을 테다. 30년 전 쯤 아버지도 서 있었을 이 자리의 의미를 나는 그제서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어색하게 웃고 계셨을까?

  입소식이 끝나고, 똑같이 삐뚤빼뚤하게 머리를 민 몸들의 대열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 나는 실감했다. 지금 내 몸에 작용하는 강제력의 원천을 실감했다. 지금도 우리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법전 어딘가에 적혀있을 몇 문장의 힘을 실감했다. 언어로 구체화된 규범과 신념의 힘을, 곧 언어의 힘을 실감했다. 그 공간에 모여 있던 수 천의 몸뚱아리를 지배하는 것은 단 몇 줄의 글이었다. 물론 모든 말과 글이 그토록 위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 문장들의 뒤에는 수 천만의 인식과 동의와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헌법의 몇 문장은 매개체일 뿐, 우리 수 천은 수 천만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 이 신념을 지탱해 온 이들의 시간들을 합산한다면 수 천만이 아니라 수 억이겠지. 지금 여기 모인 민머리들의 사념이 아무리 강한들 수 억의 일상적 신념을 꺾을 수 있겠는가? 법이라는 체계, 언어로 구성된 선언과 명령의 체계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저 실체 없는 일상적 신념들의 총화이다. 

  대열 속을 걷는 내 발걸음이 낯설었다. 이 걸음이 익숙한 사람은 여기에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다른 몸들과 교감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몇 시간 지속되었던 침묵은 전우애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유대감이 싹트는 소리였다. 오직 너와 나만이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와 나는 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2

  그 날을 회상하면 지금도 미묘한 감정들이 밀려오곤 한다. 그 때 내 몸을 휘어잡기 시작한 몇 줄의 글은 여전히 내게 자유라는 이름을 갈망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전락했다. 그 날 느꼈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상실감. 무력감. 분노.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추락의 공포였다. 전락과 추락은 같은 락落자를 쓴다. 떨어지다. 그렇게 나는 떨어졌다. 자유 없음을 향한 자유 낙하의 끝에서 느낀 건 공포심이었다.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우리가 단 한 번의 선언만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몸뚱아리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장소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끊임없는 인정recognition이 필요하다. 이 인정의 흐름을 잠시라도 놓쳐버리는 순간,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장소를 박탈당하고 벌거벗은 몸이 된다. 고깃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사람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수행해야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쟁취해야만 한다. 인정은 말과 글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사람이 말을 이루기 이전에, 말이 사람을 이룬다. 이것은 고깃덩어리도 자동기계automata도 아닌, 사람입니다! 이것은 살육기계도 노동기계도 아닌, 사람입니다! 선언이자 증명이자 담보인 이 말 한 마디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이 말 한 마디가 나에겐 필요하다.

  법의 위력이 살갗에 와닿는다. 사람인 나를 보호해주던 구절들은 힘을 잃었고, 내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구절들은 나날이 나를 구속해갔다. 영내를 벗어나 군복을 벗고 사람들 속에 섞여있을 때조차 몸을 사리는 습관이 생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음식을 입에 문 채 길을 걸으면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 이 평범한 행동들이 어색해진 손은 가끔 몸 언저리를 방황한다. 푸코는 옳았다. 언어에는 분명 신체를 통제할 정도의 구속력이 담겨 있다. 언어의 역학은 곧 정신의 역학이고, 정신의 역학은 결국 신체에까지 작용한다. 법과 규율은 신체를 재조직한다.

3

  올 겨울 들어 가장 눈이 굵게 휘날리는 날이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영내 풍경도 하얗게 새어버리고나니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하얗게 타들어간 담뱃재가 눈의 행렬 속으로 섞여들자 재와 눈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하늘에서 재가 휘날려 쌓이는 것만 같았다. 흩날리는 눈 결정들 속으로 내가 내뱉은 약속의 말들이 스쳐 지나간다. 요즘 부쩍 약속을 자주 말한다. 우리 나중에. 내가 나중에. 꼭. 미래를 향하는 말들만 잔뜩 늘어놓는다. 현재를 약속할 수 없는 입장이라서 그런 걸까. 지금 내 모습에 불만이 많은 거겠지. 그러니까 약속이다. 약속은 특이한 형식의 발화이다. 그것은 미래의 상태에 대한 예견이다. 미래를 그렇게 이행해 나가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투영한 내 욕망을 실현하라는 스스로에 대한 명령이다. 그러니까 약속이다. 나는 나를 예견하고, 나를 선언하고, 나를 명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현재를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일 테다. 현재가 쌓여 미래를 만드는 법이지만, 지금의 나는 미래를 쌓아가며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셈이다. 이 모순의 부채는 누가 언제 갚나? 미래의 내가 갚겠지. 부탁해. 미래의 나에게 진 빚을 미래의 내가 갚게 되는 역설. 타임 패러독스.

  어릴 적의 내가 약속했던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내가 예견하고 선언하고 명령했던 모습대로 살고 있는가? 그럴 리가.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약속에 따라 지금 내가 살고 있다면, 나는 그 때 이후로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다. 어린 내가 지금의 나에게 투영한 미래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이상적인 미래를 다시금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 때 느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의 나는 시간이 지나면 그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는 점이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말했던 약속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내 힘으로 정당성을 쟁취한 돈을 내 손에 쥐게 되는 날, 아버지에게 돼지국밥을 한 그릇 대접하겠다 하였다. 자립의 증명이다. 왜 돼지국밥인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음식이고, 내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가격이기 때문이겠지. 결국 가족들과 둘러 앉아 내가 계산한 돼지국밥과 수육을 배부르게 먹었던 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에 비해 나는 그리 기쁠 수 없었다. 내 욕망의 목록에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닌 미래의 내 모습들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 그릇에 담아야할 건 국밥이 아닌 모양이었다.

  벤츠. 아우디. 테슬라. 내가 말하는 약속에 이런 단어들이 등장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호호 불어가며 뜨던 돼지국밥은 이제 테슬라가 되어 있었다. 세속적인 것은 현실적인 걸까. 현실적인 것은 어른스러운 걸까. 그렇다면 나는 어른을 향해 한 발 딛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세속적인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걸까.

  사람이 따뜻한 국밥 한 그릇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 있었다.

4

  약속-발화에는 현실을 구성해나가는 힘이 있다. 한 집단의 담론이 그 집단의 진리집합을 구성해낼 수 있다는 식의 후기 비트겐슈타인적 발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기호학적 심리학이라고 부를 만한 발상이다. 약속이 현실을 만드는 힘은 사람의 인식과 심리를 조율하는 데서 발생한다. 우선 예견된 미래는 내 인식 속에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선언된 미래는 그 이미지를 타인의 인식 속에 이식한다. 마지막으로 명령된 미래는 예견된 미래를 이행하도록 만들고, 선언된 미래와 일치될 때까지 강제력을 발휘한다. 요컨대 내가 상상한 미래의 내 이미지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그걸 실천하기 위한 동기를 나와 타인 사이에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 강제력은 앞으로의 언행을 좌우하게 되고, 결국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내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니 약속에는 현실을 구성해나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5

  말이 현실을 만들고, 현실은 몸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신체 기관 중에서도 말소리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혀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 아닐까? 말소리가 생성되어 몸 밖으로 나올 때까지 발성기관과 공명기관의 힘이 필요하지만, 결국 소리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음기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움직이는 혀. 혀야말로 우리의 현실을 자아내는 일등 공신이다. 중추신경계를 제외하면, 가히 혀가 몸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래서일까? 혀는 인간의 에로스를 지배한다. 우리는 혀로 상대에게 낭만을 전달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만들어내는 혀의 움직임은 에로스의 강림을 촉구하는 제의다. 신성과 접촉할 수 있는 사제가 집단을 좌우하는 카리스마와 권력을 부여받듯이, 혀는 우리 육체와 정신에 에로스를 불러들이는 최고 권력 기관이다. 혀는 두 정신이 맺어지는 것을 매개하는 언약의 창이기도 하고, 두 육체가 맺어지는 것을 매개하는 관능의 창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혀와 혀를 마찰시키는 행위에 그토록 낭만과 욕정을 위탁하는 것이다. 혀가 다른 혀를 만날 때, 정신과 육체 또한 그 지점에서 교접한다. 정신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육체를 대표하는 기관인 혀와 혀가 만나서 교접한 후에, 우리는 서로의 육체에 대한 접근과 침입을 허락하고 무방비한 나체를 드러낸다. 사랑한다는 말도, 사랑하자는 약속도, 키스도, 애무도, 모두 혀가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6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수줍은 몸은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녀의 방어적인 몸짓은 그녀가 겪어온 역사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제 안심하라고. 이제라도 우린 서로를 만났으니 안심하라고. 그녀의 혀는 그녀가 들려주는 상냥한 말과 같은 촉감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하지만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런 촉감이었다. 갈증이 일었다. 그녀도 같은 갈증을 느꼈을 테다. 혀를 통해 맞닿는 것만이 그 갈증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인 양, 우리는 몇 시간을 그렇게 엉켜있었다. 우리는 몇 시간을 그렇게 몸과 영혼을 교접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눈으로 고백했다. 그러자 우리의 혀는 서로의 초대를 받아 다른 부위로, 다른 기관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와 나, 그녀의 몸과 나의 몸이 사자대면을 하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몸에 깃든 역사를 함께 짚어 본 날이었다.

  내 혀가 그녀의 혀에 처음 닿았던 순간, 그녀와 나 사이에 에로스가 강림했던 순간. 내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동안, 그녀는 내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테다.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너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 사이에 있어(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영화 속의 두 사람도 서로의 눈동자를 비춰보는 사이 에로스 신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들이 본 에로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활을 들고 있었을까. 날개를 달고 있었을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을까. 혹은 선악과를 베어 문 직후의 아담과 같은 얼굴이었을까.

  그녀의 혀와 몸을 더듬었던 내 혀는 그녀에게 약속을 말한다. 우리 나중에. 내가 나중에. 꼭. 테슬라 모델3를 타고 광화문에 돼지국밥 한 그릇 하러 갈까? 거기 내가 좋아하는 셰프가 운영하는 국밥집이 있어. 그녀와 함께라면 세속적인 어린아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그녀와 농담 같은 진담 같은 농담을 주고 받는다. 말을 주고 받는다. 혀로 조심스레 핥아보았던 야망을 주고 받는다. 혀를 주고 받는다.

  훈련소 집합장에 섰던 날, 나는 몸을 지배하는 언어의 권력을 체감했다. 머리칼은 깎여나갔고, 타인의 잠투정으로부터 내 수면을 방어하는 법을 배웠다. 인격이라는 아우라가 벗겨내어진 고깃덩어리 같은 내 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처음 초대받았던 날, 나는 다시금 몸을 지배하는 언어의 권력을 체감했다. 사랑이라는 언약이 두 사람의 로맨스와 섹슈얼리티를 활성화시키는 과정을 목격했다. 숭고한 대화가 난잡한 욕정으로 전락하는 순간의 에로티시즘을 배웠다. 말로 나누던 애무가 몸으로 옮겨갈 때의 카타르시스를 발견했다.

  말은 몸을 지배하고, 현실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약속이다. 나는 내가 지배하기 힘든 현실을 움켜쥐기 위해 약속을 말한다. 약속이라는 말을 행한다. 그러니 이제 다음 수순은 약속을 행하는 일이다. 타임 패러독스를 해소하는 일이다. 미래의 나에게 진 빚을 지금의 내가 갚아나가는 일이다. 나는 예견한다. 나는 선언한다. 나는 명령한다. 나에게. 그리고 너들에게.

  혀에 조심스레 힘을 주어 ‘약속’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