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2019.9.18

나는 언제나 까다로운 백지였다. 흑연으로 꾹꾹 눌러 새긴 문장들은 하룻밤을 견디지 못하고 휘발하곤 했다. 연필을 꺼내 든 사람들은 내 입 모양을 따라 몇 글자 끄적이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떠나갔더랬다. 나는 그들의 선곡표를, 그들의 일기를, 그들의 대사를 내 안에 받아 적었다. 나는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종이를 펼쳐 내밀곤 했지만, 부분부분 말소된 어설픈 필사본에 그들도 적잖은 실망을 느꼈겠지.

그도 그 중 한 명이었을까? 그도 백치 같은 내 모습에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발걸음을 옮겨 간 것일까? 그는 늘 한 발자국 떨어져 내 필사본을 넘겨보며 웃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의 웃는 표정이 보고싶어 연필을 움직이는 손을 서둘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밤마다 거울 앞에서 자조하는 표정을 연습하곤 했던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묻은 건 미소가 아니라 조소였다는 것을.

나는 내가 그의 눈에 비친 세계를 들여다볼 때 그도 내 눈을 들여다보길 바랐다. 내가 그의 선곡표를, 그의 일기를, 그의 대사를 내 안에 받아 적을 때 그도 함께 연필을 쥐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비뚤어진 내 글씨에 진저리를 느끼고 있었겠지. 그는 역시나 흥미를 잃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여러 번 앓았던 표정, 여러 번 잃었던 시선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일기에서 비롯된 몇몇 문장들이 내 안을 어지러이 메아리 치고 다닌다. 그의 문장들은 휘발이 더디다. 어쩌면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까다로운 백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그에게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던 종이 위에 그를 위한 마지막 오마주를 기록했다. 그 기록마저 휘발할 때쯤이면 나는 어리석음과 미성숙함의 차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