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빚지고 있는 ‘너’들에게

2019.9.10 <희랍어 시간>을 읽다가

새까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방 안에서 서로 그 동안 썼던 일기를 교환했던 밤.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서로에게 고백하지 못한 긴 공백의 시간을 함께 더듬었지. 우리는 캄캄한 밤하늘의 색보다도 어두운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옮겼고, 서걱이는 모래 소리와 파도에 섞여 부서지는 소금기의 짠내를 즐기며 몇 시간이고 걸었지. 너는 나에게 수평선 너머에 보이는 죽음의 형상에 대해 설명했고, 나는 그런 너의 죽음 충동이 사랑스러웠어. 나는 어쩌면 네 안에 깃든 뮤즈가 실은 타나토스인 게 아닐까 생각했어.

낯선 땅에 발이 익숙해질 때까지 함께 방황했던 밤.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 연기로 호텔 방의 정적을 채워나갔던 밤. 방 안을 온화하게 적시는 그 묵묵한 정적에 나는 어느 때보다도 안정을 느꼈었지. 그 날 나는 스스로의 욕망과 어리석음에 속아 나와 또 다른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너는 맥주 캔을 들고서 내 표정을 실컷 비웃어 주었지. 아마 너의 쾌활한 비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그 날 잠들지 못했을 거야.

오랜만에 함께 열차를 타고 차창 너머로 풍경들을 넘겨보았던 늦여름의 오후. 너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답례라며 내게 ‘작별’을 건네주었고, 나는 너의 눈망울에 맺힌 애수의 흔적을 따라 그 활자들 사이를 오갔지. 나는 지금 ‘희랍어 시간’을 읽으며 그 시간을 되새기고 있어. 우리는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을까? 같은 문장들을 삼키고 있었을까?

네 좁은 방 안을 나란히 누워 있던 밤. 너의 책장을 짚어보면 방대한 지성의 역사가 그 좁은 방 안에 무한히 펼쳐지곤 했지. 네 평 남짓한 너의 방은 아마도 그 어떤 우주보다도 넓은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해. 너는 이 우주의 어디쯤에 책갈피를 꽂아 놓았을까? 햇살이 우리의 밤을 알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탐구를 멈추지 않았지. 그럴 때면 나는 호기심 많은 네 눈동자를 거울 삼아 세상을 저울질하곤 했었지.

내 이름이 내걸린 무덤으로 찾아와준 너에게 물 한 잔과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던 어느 여름날. 우리는 향 대신 연초를 무덤에다 꽂아 놓고 해가 다 타들어가도록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지. 지평선에 낮게 걸려있는 해를 피해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눈을 감고서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를 함께 외치며 몸을 뉘이고 있었지.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연기에 섞인 너의 냄새가 그리울 때마다 무덤 근처를 서성이며 네가 꽂아 놓고 간 연초에 불을 붙이곤 해.

너와 함께했던 이 장면들이 지금의 나를 지배하는 삶의 이미지야.
이토록 내가 나를 빚지고 있는 ‘너’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