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SLEEQ

2019.7.3 휴식 시간에 갑자기 슬릭이 떠올라서 오랜만에 뮤비 찾아 보다가 소름 돋아서 기록

요즘 힙합 잘 안 듣는다. 한 때는 힙찔이를 자처하며 아침 눈 뜰 때부터 밤잠에 들 때까지 랩만 주구장창 틀어댔었는데 말이다. 그들이 쓰던 가사를 좋아했다. 그 가사를 읽고, 이해하고, 따라 뱉으며 되새기는 그 쾌감을 좋아했다. 요컨대 리리시즘 힙합을 좋아했다. 아쉽게도 이제는 죽어버린 장르다. 화나의 “그날이 오면”을 들으며 ‘그날’을 함께 기다렸었는데… 이제는 화나의 “가족계획”을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있다. 쇼미더머니를 탓하고 싶다. 꿈이랑 돈을 헷갈리는 꼬맹이들이 뱉어대는 꿈팔이인지 돈구걸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왜 음악이랍시고 듣고 있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발정나서 떠들어대는 젠더감수성 빻은 헛소리거나. 아니면 연애놀음에 실패했다고 징징대는 푸념이거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아직 듣는 래퍼들 몇몇 있다. 내가 듣는 랩들은 현역이라고 부르기엔 활동이 너무 뜸해서 사실상 퇴물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면 데이즈얼라이브. 제리케이랑 슬릭이 현역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 지금 현역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리리시즘을 간직하고 있는 래퍼들. 오늘은 갑자기 힙합이 듣고싶어졌는데, 지금 다운받아놓은 음원이 타블로의 [열꽃]이랑 화나의 [Fanabyss]밖에 없다. 음… 오늘은 우울에 잠겨있을 기분은 아닌걸. 컴퓨터방에서 오랜만에 슬릭을 검색했다. 처음 들은 건 역시 “Ma girls”. 리릭도 스킬도 감정연기도, 정말 슬릭의 최고 아웃풋이다. 이건 말이 필요 없는 띵곡.

슬릭이 랩을 못한다는 평가도 종종 들려온다. 아니 진심이야? 슬릭이 페미니스트 래퍼를 표방한다는 점 때문에 그냥 까고 싶은 거겠지.

다음으로 듣고 싶었던 곡은 “Liquor”. 슬릭 곡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이 감성… 어떻게 이런 프로듀싱에 이런 가사에 이렇게 졸린 듯한 랩핑까지 완벽하게 조화로운걸까. 리쿼. 정말로 발효주가 아닌 증류주가 어울리는 감성이다. 때로는 술이 아니라 알콜이 마시고 싶은 그런 기분. 증류주는 거의 마시지 않지만, 가끔 증류주가 생각이 날 때면 딱 이 곡과 같은 감성이 몰려올 때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슬릭이 랩을 못한다고? 아무튼 헛소리는 ㄴㄴ다. 슬릭 랩 존나게 잘한다. 유려하게 흘러가는 빠른 템포의 플로우 사이에 한 두 음절의 짧은 라임을 빈번하게 심어놓는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무심한듯 다음절 라임을 빠르게 뱉으면서 쾌감을 터뜨린다. 거기다 유려한 플로우가 지루하지 않도록 레이백을 활용해 그루브를 살리는 스킬도 놓치지 않는다. 딱 라임어택이나 허클베리피 계열의 ‘한국어식 랩핑’인 셈이다. 한국어식 랩핑이라고 하면, 빈지노처럼 한국어를 영어처럼 구사해서 그루브를 짜내는 경우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한국어 음운의 불연속적 특징을 죽이지 않고 한국어이기에 가능한 청각적 쾌감을 잘 살리는 방식을 말한다. 아마 한국어식 라이밍의 극단에는 피타입이 있지 않을까?

절대 스킬 때문에 가사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람어택이나 헉피에 비견되는 실력을 엿볼 수 있다. “Liquor”에서처럼 멜로디랩 요소를 넣을 때는 수다쟁이가 연상되기도 한다. 어쨋든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리리시즘 래퍼들의 반열에 슬릭을 슬쩍 올려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사실 스킬만 보면 제리케이가 진짜 끝내주는 랩을 구사하지만, 리릭과 음악성을 고려한다면 제리케이보다는 슬릭에게 한 표.

언젠가는 위 두 곡에 대한 내 애정을 제대로 된 비평으로 담아내보고 싶다. 지금은 피곤해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