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판타지, 하이퍼리얼

2020.06.07 정리하지 않은 메모

타인의 현실보다 자신의 망상이 더 소중한 것이 인간이다.

식당에서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티비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았다. 난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그 프로가 너무 거슬렸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봤다.

현대 사회는 매체의 권력이 너무나 지배적이다. 라디오든 텔레비전이든 유튜브든,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다발적인 전파가 가능한 모든 매체들을 말한다. 매체는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상과 가치관의 표준을 설정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삶이 현대적 삶의 표준적 이미지가 되고,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우리 모두가 내면화해야 할 규범이 된다. 오우 정말이지 완벽한 파시즘이다. 문화적 파시즘.

특히 생활상을 가장 집요하게 교육하는 컨텐츠는 예능이다. 예능은 그 특유의 자극적이고 중독성 있는 편집 연출로 이목을 잡아끌고, 저렴하고 말초적인 내용을 시청자에게 반복 학습시킨다. 그 내용 안에 은근하게 녹아 있는 문화적 규범들이 시청자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가장 큰 문제는 예능 프로가 자극성을 위해 판타지를 생산해낸다는 점이다. 진짜 같은 가짜, 눈에 보이는 판타지. 현실과는 동떨어진 문화적 이미지들이 재미라는 탈을 쓰고 리얼을 잠식해 나간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도 시청자들이 승인하는 순간 현실성을 얻게 된다. 진짜보다 더 진짜가 되어버린 가짜, 하이퍼리얼. 예능에 나온 연예인들은 그저 먹고, 놀고, 배설한다. 그 무절제한 욕망에의 탐닉이 현실을 지배하게 된다.

먹방을 보아라. 먹음에 대한 아무런 유의미한 담론도 없이 그저 먹는 행위만을 재생한다.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식욕을 자극당하게 되고, 식욕은 단순한 생리적 욕구를 넘어 음식에 대한 탐욕적 욕망으로 확대된다. 먹방의 시청자는 방송인이 먹고 있는 그 음식을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인이 반복재생하고 있는 그 먹음이라는 행위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다. 예능의 연출 방식은 먹음이라는 행위를 클로즈업하고, 방송인의 행복한 가짜 웃음을 병치시킨다. 먹음과 행복, 또 먹음과 행복. 스크린에 병치된 먹음과 행복은 동일시된다. 먹방은 먹음이라는 행위가 행복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허구적 약속을 시청자들에게 맹세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한국 사회다. 음식에 대한 담론은 배제되고, 그저 먹음이라는 행위만이 유행하고 있다. 음식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먹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저 방송인이 보여주던 먹음이라는 퍼포먼스를 나도 흉내내고 싶을 뿐이다. 정작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가서 먹어보면 그리 행복하지도 않다. 어차피 음식을 음미하는 능력도 없으니까.

연애 시뮬레이션 컨텐츠도 정말 가관이다. 요즘 하트 시그널이라는 프로그램이 자주 거론되는데, 연애 시뮬레이션의 전형이다. 사랑의 과정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가장 초기 형태의 사랑이 보여주는 환상들만 클로즈업한다. 사랑의 낭만화. 반복재생되는 달달한 환상에 매료된 시청자는 허구적 사랑을 갈망하게 된다. 구체적인 몸과 인격을 가진 현실의 사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텔레비전에서 두근두근 썸을 타는 방송인들이 짓던 행복한 가짜 웃음을 나도 지어보고 싶을 뿐이다. 아무나 좋으니 그 달달함 감정을 나도 맛보고 싶다. 매체가 약속하는 그 환상을 탐닉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당연히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다. 그 결과가 현대인들의 유치한 연애놀이다. 사랑을 원하면서 사람을 원하지는 않는다. 연애는 1~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종말을 맞는다. 매체가 약속하던 사랑의 이미지, 호르몬이 제공하는 달달한 환상은 약효가 짧기 때문이다.

매체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생산해낸다. 현대인들은 그 판타지를 무비판적으로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 판타지는 현실의 인간을 괴롭힌다. 왜곡된 식욕은 무절제하고 무지한 소비를 부추겨서 음식 산업을 기형적인 구조로 몰고 간다. 왜곡된 성욕과 연애관은 낭만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의 인간들을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관계의 굴레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 결과 사람들의 연결은 공허해지고, 데이트 폭력이라던지 여러 갈등으로 서로 주고받는 고통만 확산될 뿐이다. 매체가 생산해낸 하이퍼리얼이 우리 현실을 잠식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그 하이퍼리얼리스틱한 판타지에 갇혀서 자폐적 증상을 보인다. 하이퍼리얼이 현실과 마찰할 때는 현실 쪽을 부정한다. 특히 타인의 현실에는 정말이지 발톱의 때보다 무관심하다. 매체로부터 학습한 자기만의 망상을 보느라 바빠서 타인의 현실 따위는 안중에 없다. 먹방 보고 하트 시그널 보니까 흐뭇하고 참 좋은데, 누군가 어디서 자유를 탄압받고 차별로 죽어나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아 예쁘고 애교넘치는 여자애랑 연애나 하고 싶다. 아 나도 한입만 먹고 싶다. 한입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