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맥퀸 [Shame]

————- 미완성 ————–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셰임>은 관계 맺음과 섹슈얼리티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적인 정서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사뭇 감성적인 인상과는 달리, 감독은 장면 사이사이에 묵직하고 날카로운 문제 의식을 녹여내고 있다. <셰임>은 단순히 쾌락에 탐닉하는 허무주의 감성을 전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을 허무 속으로 밀어 넣는 사회 구조의 모습을 포착한다.

멸균된 순백의 세상, 그리고 울타리

브랜든의 욕망은 세상과 마찰한다. 세상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범위를 제한하고 규범을 종용한다. 거세되고 멸균된 무균실 같은 세상에 울타리가 세워진다. 이 울타리는 정상인의 삶을 규정한다. 허용된 것만을 욕망하고, 평생 한 울타리를 지키며,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 속에 안주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공통 과제다. 이 정형화된 삶의 강령을 따르지 않고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는 방랑자들은 균으로 간주된다. 울타리는 정상인들에게는 평화와 안정을 약속하지만, 방랑자들을 방황하게 하고 그들의 실존을 위협한다.

We’re not bad people. We just come from a bad place.

브랜든은 스스로를 네안데르탈인에 비유한다. 자유를 꿈꾸는 방랑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또 다른 인간이다.

브랜든과 메리앤의 대화 장면에서는 롤링 스톤즈를 비롯한 ‘60년대 음악가’, 즉 히피 문화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60년대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브랜든은 히피 문화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처럼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규범에 따라 스스로 획일화된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태도가 만연해있고, 그 틈에서 자유로운 욕망이란 그저 불결한 망상이자 광기일 뿐이다. 메리앤은 브랜든의 이상을 혼돈으로 취급하고, “지금, 여기(here, now)” 순백의 세상에 불만 없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자발적으로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그 지루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부자연스러운 삶은 노예의 삶에 다름 없다. 브랜든은 여자가 자신과 달리 울타리 속의 세계를 살아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임을 인식하자 욕정을 잃어버린다. 침대 위에서 평범하게 치르는 마치 성스러운 의례와 같은 섹스는 그를 흥분시키지 못한다. 메리앤을 돌려보낸 브랜든은 창부와의 노출-페티시즘적인 섹스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재확인한다.

세상을 멸균하려는 힘은 마치 면역체계가 작동하듯 정상인들의 인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성실하고 내밀하게 작동한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이 면역체계의 감호 속에서 이루어진다. 울타리의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소유 당하는 관계를 맺고, 모두가 울타리의 감시자가 된다. 존재를 허락 받지 못한 방랑자들은 면역의 시선을 피해서 부유한다.

광란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인 클럽조차 면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씨씨와의 갈등 직후 홀로 클럽을 찾은 브랜든은 한 여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곧바로 여자의 ‘주인’이 등장하며 브랜든에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한다. 감독이 이 장면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시선은 여자의 반응에서 드러난다. 여자는 브랜든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에 찬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이 등장하자 이내 드러내고 있던 욕망을 숨기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허락 받지 못한 욕망은 은폐되어 있을 뿐, 어디에나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담아내고 있다. 실재하는 욕망을 부정하고 부자연스러운 규범을 세워놓은 사회의 부조리함이 이 장면을 통해 폭로된다. 결국 클럽에 다시 입장하려다 저지당한 브랜든은 게이 클럽으로 헤매어 들어간다. 자유로운 난교의 현장으로 묘사되는 게이 클럽은 아마도 그 순간 브랜든의 존재가 허락되는 유일한 공간이었을 테다.

  마지막 장면, 지하철에 탄 브랜든은 욕정의 대상을 포착한다. 여자와 욕정의 신호를 주고받던 찰나, 여자의 손에 끼워진 울타리의 징표를 발견한다. 반지를 보는 브랜든의 눈빛에는 체념과 증오가 섞인 듯한 어지러운 감정이 서려 있다. 브랜든의 얼굴은 이 순백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방랑자들의 얼굴이다.

수치심Shame

  사회를 멸균하려는 도덕 규범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자기 검열의 형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내면화된 자기 검열은 수치심이라는 기제를 통해 개인을 억압한다. 브랜든은 스스로의 욕망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는 자기 검열이 만들어내는 수치심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짓눌린다. 두 명의 창부와 함께 셋이서 뒤엉키는 장면에서는 욕망과 수치심 사이를 방황하는 브랜든의 불안과 공포가 온 몸을 휘감으며 격동한다. 패스벤더의 연기는 쾌락 속으로 침몰하는 동시에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입체적인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씨씨

브랜든은 자신을 억압하고 불안감 속으로 밀어 넣는 수치심과의 긴장 상태에 지쳐있다. 반면 여동생 씨씨는 수치심을 모른다. 육친이 있는 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사와 뒹굴며 교성을 들려준다. 그리고 나서는 브랜든의 침대로 파고들어 그에게 몸을 기댄다. 스스럼없이 브랜든의 공간을 침범하고, 육친의 자위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장난스럽게 받아들인다. 씨씨는 그저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브랜든은 그렇게 수치심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씨씨의 모습에 조바심을 느낀다. 브랜든에게 있어 씨씨는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녀의 존재는 브랜든에게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는 욕망과 그 고통을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브랜든은 씨씨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브랜든이 씨씨에게 쏟아내는 모진 말들은 사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자조적인 다그침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브랜든은 씨씨에게 연민을 느낀다. 브랜든의 갈등은 내면에서 조용히 진행될 뿐, 그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는 무균실 같은 사회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아 영합하고 생존하는 법을 익혔다. 반면 씨씨는 욕망을 검열 없이 표출하기 때문에 그녀의 생존 자체가 위협 속에 놓이게 된다. 그녀의 욕망이 사회 규범과 마찰한 흔적들이 그녀의 손목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브랜든은 또 한 명의 자기자신이 세상에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씨씨를 그러안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브랜든과 씨씨의 애증의 관계는 이 양가적인 감정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다.

형식이라는 억압

<셰임>이 선택한 소재는 성애적인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문제의식은 사회가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성애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향하고 있다.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통제하고 관계의 형식을 규정하려고 하는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이 영화 곳곳에서 재현된다. 특히 브랜든과 씨씨의 관계를 통해서 이러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는데,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양가감정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문제가 혼입하고 있다. 브랜든과 씨씨의 관계에는 이 두 가지 문제가 함께 녹아 있어 입체성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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