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 히데아키 [End of Evangelion]

———– 미완성, 다듬어야 함 ————-

AT필드: 자기와 타자 사이의 간극

– 파일럿이 어린 아이여야만 했던 이유는 아직 AT필드를 완성하기 이전의, 즉 타자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하기 이전의 인간이어야만 AT필드를 찢고 깨부술 수 있기 때문. 어른은 이미 AT필드를 완성하고 자아의 장벽을 완성해 자기동일적인 주체로 응고되어버림. 어린 아이는 아직 타자의 태내에서 타자와 융합했던 경험을 간직하고 있으며, 타자의 벽[AT필드]에 의한 절망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쉽게 찢을 수 있음.

정신분석학 코드

– 아버지, 어머니, 아이의 삼자대립은 지극히 정신분석학적인 코드가 녹아 있음. 어머니와의 융합을 갈망하는 아이는 상상계 속에서 자아를 어머니에 동일시하는 단계. 이카리 겐도를 비롯한 아버지들의 존재는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떼어놓고 기호들의 세계인 상징계의 질서로 끌어들이는 장치로서 반복해서 그려지고 있음. 그 속에서도 어머니와의 결합을 갈망. 결국 상징계의 질서에 안정적으로 안착하지 못한 파일럿들은 실재계의 영역으로 전락. 즉 미쳐버림.

– 미사토, 카지, 리츠코 등을 대표로 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의 세계와 대비시키는 장면이 반복됨. 어른들의 세계란 이미 고착화된 자아들의 경계와 벽으로, 타자를 타자성 안에서 접할 수 없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관계. 희망도 갖지 않고 절망도 갖지 않는 미지근한 관계맺음이 미덕으로 비춰지는 “동일성의 지옥”(한병철). 미사토와 카지는 끝내 서로의 내면을 보지 못한다.

– 어린 파일럿들은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고 그 세계 속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어른의 질서’ 이전에는 자아의 조각들이 흩어져있기에 타인들과 쉽게 융화할 수 있었지만, 주체로서의 자아를 고착화하라는 어른들의 명령 때문에 그 융화 능력을 잃어버린다.

실존에 관해 던지는 메시지 (사르트르)

–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절대적인 우연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우연한 존재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근거일 수 없다. 타인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은 지옥이다. 끝없는 시선 투쟁 속에서 사랑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존재론적 근거를 희구하는 무한한 갈증이 인간을 속박하고, 지옥으로서의 타인을 무한히 직면해야 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는 지옥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로 타인을 마주할 수 없다. 타자성의 침입은 자기동일적 세계를 깨뜨리고 자아를 죽이는 유사-죽음의 경험이다.

–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결국 사디즘과 마조히즘만이 반복될 뿐이다. 타인을 나의 자기동일적 세계로 추락시키는 사디즘, 혹은 자기 스스로를 사물존재로 전락시키고 타인의 세계로 내던지는 마조히즘. 사디즘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의 갈구와 실패는 반복된다. 아스카는 사디스트의 전략을 택했고, 신지는 마조히스트의 전략을 택한다.

고슴도치 역설

– 타인을 갈망한다. 하지만 타인은 내가 타인에게 투사하는 욕망을 항상 빗겨나간다. 내가 원하는 존재로서 존재해주지 않는다.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이다. 내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타자성은 용인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조차 없다. 잡힐 것 같지만 영원히 미끄러져 나가는 타인의 손은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이다. 고통을 견딜 수 없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타인을 죽여야 한다. 하지만 타인이 죽으면 살아있는 ‘나’의 존재를 구획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타인을 갈망한다. 모순은 해소될 수 없고, 고슴도치는 영원히 고독하다.

네크로필리아적 욕망

– 손은 다른 손을 잡기 위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손 대신에 자신의 욕망을 움켜쥘 수도 있다.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인 타인을 죽이고 인형으로 삼는 것이 가장 달콤한 전략이다. 병실에서 시체-인형이 된 아스카를 마주하는 순간, 신지는 갈망하던 타자 속에서 잡히지 않는 타자성이 소실되고 남은 찌꺼기를 본다. 그래도 여전히 몸에는 영혼의 흔적이 머무른다. 영혼의 잔상은 손이 닿을 거리에 있다. 신지는 잡히지 않는 것을 포기하고 잡히는 것을 잡는다. 네크로필리아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일 것이다.

결의

– 인간의 내재적인 모순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고 극한까지 반복하여 곱씹은 끝에 내린 안노의 결론은 결국 다시 그 모순을 반복하겠다는 다짐이다. 얼마나 애처로운 고민이며, 아름다운 결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