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배

2020.01.31

  잔이 비어버리는 게 두려워 나는 계속 웃음을 채웠다. 그러자 나는 웃음이 두려워졌다. 우리가 들고 있는 이 축배가 우리에게는 독일까? 너의 진실된 울음을 보는 것이 두려워 공허한 웃음을 채워넣었으니. 울음이 익숙한 너에게 내 어색한 웃음을 삼키게 하고 있으니. 잔이 다시 … Continue reading

결말

19.11.23 – 19.11.24

너의 말은 그 격정적인 의미를 숨기려는 듯 건조하게 울려퍼졌다.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지만, 그것이 소리로서 형체를 갖추는 그 순간만큼은 결말을 부정하려는 듯, 섬뜩하고, 무겁고, 슬픈 침묵들이 섞여 있었다. 이 덧없는 환상이 아쉬워 결말을 뒤로 미루어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을 … Continue reading

실어증

19.10.06-19.10.16

나는 고장난 레코드 기계처럼 부분부분 끊어진 구절들을 반복해서 뱉어냈다. 그러고는 힘겹게 더듬으며 내뱉은 말들을 이내 주워담곤 했다. 청자를 잃은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아무래도 백해무익했다. 아니 애초에 말을 건넬 상대도, 말로 건네고 싶은 삶의 내용도 내겐 허용된 적이 없었다. 결합이 … Continue reading

백지

2019.9.18

나는 언제나 까다로운 백지였다. 흑연으로 꾹꾹 눌러 새긴 문장들은 하룻밤을 견디지 못하고 휘발하곤 했다. 연필을 꺼내 든 사람들은 내 입 모양을 따라 몇 글자 끄적이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떠나갔더랬다. 나는 그들의 선곡표를, 그들의 일기를, 그들의 대사를 내 안에 받아 … Continue reading

내가 나를 빚지고 있는 ‘너’들에게

2019.9.10 <희랍어 시간>을 읽다가

새까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방 안에서 서로 그 동안 썼던 일기를 교환했던 밤.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서로에게 고백하지 못한 긴 공백의 시간을 함께 더듬었지. 우리는 캄캄한 밤하늘의 색보다도 어두운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옮겼고, 서걱이는 모래 소리와 … Continue reading

이름 없는 감정

2019.8.14

영혼을 들여다보는 이 하나 없는 땅에서 영혼의 흔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닌들 무슨 소용일까? 나를 향하는 목소리들은 내 이름이나 내 몸 언저리를 맴돌다 흩어진다. 나는 누구든 좋으니 내 영혼을 불러주기를 바랐다. 방명록이 없는 영혼은 쉽게 증발하는 법이니까.

내 영혼에서는 알코올의 … Continue reading

트랙

2019.7.4

‘발 붙일 땅이 없다’는 메타포적 감정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트랙 위에 있었다. 어느 곳을 밟아도 서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계속 다음 발자국을 내딛으려 했다. 이 감정을 몸의 열기에 태워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 Continue reading

타인을 향한 낭만에 관하여

#낭만 #사랑 #타인 #표정 #실존

2019.7.3 친구와의 대화 중에 받은 영감을 기록

타인을 향한 낭만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우리는 타인에게서 사랑의 징조를 읽어냈을 때 낭만을 만나게 된다. 낭만은 온전한 사랑의 가능성을 예견하게 한다. 낭만에 조우한 사람은 상대의 표정들 위에 사랑의 … Continue reading

군번줄

2019.7.2 휴게실에 앉아 끄적임

입영 때부터 개목줄 같아서 싫어했던 군번줄을 요즘은 곧잘 목에다 걸고 다닌다. 이 부대는 군번줄을 잘 쓰지 않는 분위기라 군번줄을 차고 있는 목덜미는 시선을 끌게 된다. 종종 이유를 물어오면 ‘액세서리를 못 하니까 허전해서 이거라도 하는거야’라며 진심 반쯤 … Continue reading

감정의 불안정성에 관하여

2019.6.22 침대 위에서 끄적임

이번 글은 평소보다 조금 자유분방한 형식을 시도해보려 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의식과 감정의 흐름을 여과없이 흘려보내며 장난스럽게 끄적일 거다. 진지하게 접근했다가는 멘탈을 부여잡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또 글을 제대로 정리해서 쓰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한 못생긴 글만 … Continue reading